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대한항공 902편 격추 사건 (문단 편집) == 사건 == 프랑스 파리 오를리 공항을 이륙해 앵커리지와 도쿄를 거쳐 서울로 향하던 대한항공 902편은 북극 상공에서 갑자기 방향을 크게 꺾어 소련의 무르만스크 방향으로 비행하기 시작했다. 조종사와 항법사는 지금의 항로가 맞는지를 두고 다투었으나 기체가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 파악하지 못했고, 시속 900킬로미터로 비행하는 보잉 707 기체는 순식간에 소련 영공으로 진입하고 만다. ||[[파일:KAL902flightplan.jpg|width=100%]]|| || 대한항공 902편의 비행 경로. 자북극 근처에서 경로를 크게 벗어나기 시작하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저 초록색 항로는 지도에서 왜곡되어 휘어 보이는 것이고 실제로는 직선이다. || 902편이 진입한 지역은 방공기지가 밀집된 [[소련 해군]] [[북방함대]]의 모항인 [[무르만스크]] 상공이었고 소련 방공군은 20시 54분에 레이더로 영공 400㎞ 밖에서 자신들을 향해 전속력으로 날아오는 대형 항공기를 발견한다. 소련 방공군은 이 미확인 기체에 25분간 무전으로 접촉을 시도했으나 별다른 반응 없이 그대로 영공을 넘어오자 21시 11분에 [[Su-15]] [[요격기]]를 긴급 발진시켰다. 이후 미사일에 피격되기까지의 과정은 902편 탑승자들의 증언과 소련의 공식 발표가 다르다. 소련의 발표에 따르면 제431방공군의 아프리칸다(Африканда, Afrikanda) 군공항에서 긴급 발진한 알렉산드르 보소프(Александр Босов) 대위의 Su-15TM이 영공 침범 5분만에 대한항공 902편 조종석에 가까이 접근하여 기체를 좌우로 롤링하는 등 따라오라는 신호를 보냈으나 902편은 이를 무시하고 핀란드 쪽으로 급격히 기수를 선회해 달아나려 했다. 이를 보고받은 21 방공군의 지휘관 블라디미르 차르코프는 곧바로 10 방공군의 블라디미르 드미트리예프 장군에게 허가를 받은 뒤 격추를 명령했고[* 차르코프의 증언으로는 당시 핀란드 국경과 80km 거리였기 때문에 당시 902편의 900km 속도면 6분 안에 소련 영공을 벗어난다. 아직 항공기의 정체가 확실하지 않아 적국의 군용기일 가능성이 있고 이 경우 절대 놓치면 안 되므로 격추를 명령했다고 한다. 나중에 그는 이 결정에 대해 훈장을 받았다] __보소프는 민항기임을 주장하며 몇분간 격추를 거부하다가__[* 1983년 [[대한항공 007편 격추 사건]] 4일 후 레이건 대통령이 소련을 비난하는 과정에서 이를 언급하기도 했었다. "그 사건(902편 격추) 때는 소련 요격기 파일럿은 분명히 민항기 표식을 식별하고 어쨌든 격추하라는 명령에 계속 항의했었다."In that instance, the Soviet interceptor pilot clearly identified the civilian markings on the side of the aircraft, repeatedly questioned the order to fire on a civilian airliner and was ordered to shoot it down anyway."] 결국 21시 42분에 명령에 따라 미사일을 발사한다. ||[[파일:Korean_Boening_707_in_USSR_map.png|width=100%&align=center]]||[[파일:Soviet 431st Fighter Air Regiment PVO’s Su-15 'Flagon' at Afrikanda airport. Photo; P.Baishev.jpg|width=100%&align=center]]|| || 당시 카렐리야의 주요 군공항 위치 및 KAL 902편의 비행경로. 아프리칸다(제431방공군)와 포두제미예(제265방공군) 기지의 요격기들이 출동하였다. || 당시 아프리칸다 기지(제431방공군)의 Su-15TM || 대한항공 902편 기장의 증언에 따르면 그는 보소프의 Su-15TM를 발견하고 기체 외부의 항법등을 모두 켜고 속도를 줄여서 지시를 따르겠다는 신호를 보냈고 국제 공용 비상주파수 121.5MHz로 계속 접촉을 시도했으나[* 핀란드 로바니에미 항공 관제소에 모두 기록됨. 2000년에 공개된 교신 기록에 따르면 미사일에 맞기 전까지 김창규 기장은 대한항공 902편이라는 것을 세번 분명히 전달하였다.] Su-15TM은 아무런 반응을 하지 않다가 갑자기 미사일을 발사했다. 나중에 밝혀진 바에 따르면 Su-15TM에는 UHF(300~3,000MHz) 대역 무전기만 설치되어 있어서 해당 주파수를 수신하지 못했을 것이고 보소프는 영어를 못했기에 대응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파일:Su-15TM Alexander Bosov.jpg|width=100%&align=center]]||[[파일:kal902-damagedfuselageandcabin.jpg|width=100%]]|| || 일본인 승객 오오타니 기시오[* 당시 50세]가 대한항공 902편 기내에서 촬영한 알렉산드르 보소프의 Su-15TM. || 미사일 파편에 손상된 동체 내외부의 모습 || 승객의 입장에서는 일본인 승객 시오자키 세이코[* 좌석번호 19A]가 Su-15TM의 출현부터 비상착륙까지 1시간 42분 동안 발생한 모든 일을 시간대별로 자세히 기록했다. 이에 따르면 소련 전투기가 나타나 902편의 오른쪽에 바짝 붙어 항공기를 훑어보듯이 기수부터 후미까지 오가며 비행하기 시작했고 바로 항공기 외부의 등이 전부 켜졌다.[* 이는 상술된 김창규 기장의 항법등을 모두 켰다는 진술과 일치하는 부분이다.] 그 근처에 앉았던 프랑스 승객 쟝-샤를 포리는 승객들이 소련 전투기의 출현을 무서워하지 않았고 다들 밝은 달빛 아래에서 소련 전투기를 구경하고 사진 찍고 있었다고 증언했다. 보소프도 여객기 창문의 커튼들이 열리고 불이 켜진 객실 안의 사람들이 자신을 구경하며 손을 흔들고 사진을 찍었다고 증언했다. 하지만 Su-15TM이 곧 시야에서 사라지더니 폭발이 있었고 시오자키 세이코의 네 좌석 뒤 왼쪽 동체에 멜론 크기의 구멍이 생겼다. 장-샤를 포리는 폭발이 있은 후 앞좌석에 걸어둔 자신의 재킷에 동전 크기의 구멍이 세 개 생겼다고 말했다. 보소프가 발사한 R-60 빔펠 열추적 미사일은 첫 발은 빗나갔으나 두번째 발이 왼쪽 날개 끝을 맞춰 4m 가량이 떨어져나가고 파편에 의해 동체에 구멍이 다수 생겼다. 이 때 미사일 파편에 머리를 맞은 한국인 승객[* 방태환, 36세 [[대우건설]] 리비아 건설본부 차장, 좌석번호 24E.]은 현장에서 사망했고 어깨와 오른팔에 중상을 입은 일본인 승객 스가노 요시타카(31)[* 좌석번호 23A]는 불시착 후 소련군의 구조 중에 [[과다출혈]]로 사망한다.[* 부상이 심각해 피격 직후 이미 의식을 잃은 상태였다. 영국인 승객 윌리엄 하워드는 러시아인들의 의료지원이 느리고 부적절해 그가 죽은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외에 그의 형 스가노 야스오(33)[* 좌석번호 23B, 허벅지와 종아리에 파편상]와 처남 후쿠이 타카마사(25)[* 좌석번호 23C, 발에 파편상] 등 13명이 부상을 당했다. 피격 직후 동체에 생긴 구멍으로 인해 객실 감압 경보가 뜨자 기장은 즉시 기수를 내리고 분당 5,500피트(1,676.4m)로 급강하하여 고도를 35,000피트(약 10,000m)에서 3,500피트(약 1,000m)로 낮췄다.[* 고고도는 기압이 낮아서 감압 상태가 5~10분가량 지속되면 전원 질식사하게 되므로 가능한 빨리 고도를 낮춰야 한다.] 이때 소련군의 방공 레이더에서도 사라지고 구름을 뚫고 강하하면서 보소프의 시야에서도 사라진다. 그는 대한항공 902편이 추락한 것으로 생각했으나 지상에 아무런 화재나 충돌 흔적이 없어 어떻게 됐는지 확인하지 못했고, 5분이 넘는 급강하 동안 승객들도 추락 중이고 곧 죽는 것으로 생각했다. 시오자키 세이코의 노트에는 "우리는 이제 다 죽을 것 같다. 우리는 추락하고 있다."라고 적혀 있다. 이 시점에서 교대를 위해 제265방공군의 포두제미예 기지에서 유리 노보질로프(Юрий Новожилов), 아나톨리 케레포프(Анатолий Керефов), 세르게이 슬로보드치코프(Сергей Слободчиков), 알렉산드르 겐베르그(Александр Генберг)가 탑승한 네 대의 Su-15TM이 발진했다. 이 때 미사일에 떨어져 나간 KAL 902의 왼쪽 날개 파편이 레이더에 잡히자[* 속이 비어있고 면적이 넓어 느리게 떨어지고 있었다.] 차르코프는 순항미사일이나 버려진 스파이 장비로 판단했고 세르게이 슬로보드치코프가 R-98MR 레이더 추적 미사일을 발사해 공중에서 파괴한다. ||[[파일:kal902-landingsite.jpg|width=100%]]|| || 코르피야르비 호수. 마치 활주로처럼 긴 모양을 가지고 있다. || ||[[파일:kal902 landing attempt route.jpg|width=100%]]|| || 착륙지점 접근방향쪽 도로와 철로의 위치. 기장은 원래 도로에 착륙을 시도하려 했으나 기차가 나타나 기수를 올렸다. || 22시 45분 아나톨리 케레포프 대위의 Su-15TM이 2600피트(약 800미터) 고도에서 저속으로 날고 있는 대한항공 902편을 발견했고 12분 후에는 알렉산드르 겐베르그 소령의 Su-15TM도 따라붙었다. 이들은 대한항공 902편을 아프리칸다 군공항으로 유도하던 중 얼어붙은 코르피야르비 호수를 발견하고 강제 착륙시켰다. 케레포프의 증언에 따르면 미사일 피격 후 약 1시간 20분간 유도해 가다가[* 일반적으로 알려진 것과는 달리 미사일 피격 후 바로 비상착륙한 것이 아니다. 그리고 상시 무선 감청 및 항공기 추적을 하던 소련 정보기관에서 항공기의 정체(편명, 항로, 기종, 항공사, 승객 수, 승무원 수)를 확인하고 방공부대 지휘관들에게 전달하여 민항기임이 확정된다.] 얼어붙은 호수 등 착륙할만한 지형을 발견하고 대한항공 902편의 날개를 자신이 탑승한 Su-15TM의 날개로 계속 눌러서 착륙하라는 의사를 전달했다고 한다. 김창규 기장과 이근식 항법사의 증언에 따르면 처음에는 큰 도로에 착륙하려 했으나 기차가 나타나 급히 기수를 올렸고, 눈쌓인 긴 얼음호수를 발견하고 착륙을 시도했다고 한다. ||[[파일:Pilots Anatoly Kerefov (left) and Alexander Goryanoy.jpg|width=90%&align=center]]|| || 제265 방공군 파일럿 아나톨리 케레포프(Анатолий Керефов)와 알렉산드르 고랴노이(Александр Горяной) || 그리고 김창규 기장은 모든 악조건을 뚫고 비상착륙에 성공한다. 승객을 가득 태워 무거운 대형 여객기로 미사일에 맞아 한쪽 날개 끝이 잘린 상태에서 마찰력이 거의 없는 얼음호수 위에[* 김창규 기장은 깊게 쌓인 눈이 적절한 저항력을 제공하여 정상적으로 정지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그것도 무려 야간에 비상착륙을 시도하여 부상자 하나 없이 성공한 것은 기적과도 같은 일인데, 이는 순전히 김창규 기장의 뛰어난 조종 실력 덕분이었다. 역대 전세계 민항기 추락 사고 중에서 인명 피해 없이[* 미사일 피격에 의한 피해 제외] 불시착에 성공한 극히 드문 케이스다. 소련군도 민항기 조종사의 환상적인 기동[* "Фантастический маневр гражданского летчика"]에 대해 특기할 만한 사례로 분석했다고 한다. 소련 측은 김창규 기장이 대한항공 입사 전에 공군 파일럿이었다는 것을 나중에 알았다고 한다. 러시아, 우크라이나 등 당시 소련 측이었던 국가의 매체 기사나 당시 인물들의 인터뷰에는 그가 베트남전에도 참전해 소련 전투기들과 싸웠다는 표현이 등장하는 등, 군 조종사 경력을 가지고 김창규 기장에 대한 의혹을 제기하지만 [[베트남 전쟁]]에서 한국 공군은 수송기인 C-54D로 후방 수송을 담당한 은마부대만 참전했으며, 김창규 기장이 은마부대에서 복무했는지 여부 역시 확인이 불가능하다. 또한 공군 파일럿이 전역 후 민항기 [[조종사]]로 취업하는 것은 전 세계 어느 나라에서든 너무나 일반적인 일이므로 그가 공군 파일럿이었다는 점을 문제삼는 것은 설득력이 없다. ||[[파일:KAL902-landing.jpg|width=100%]]||[[파일:Korean_Air_Lines_Boeing_707-321_14.jpg|width=100%]]|| || 비상착륙 다음날의 모습. 김창규 기장의 증언에 따르면 착륙 후 얼음이 깨지는 등의 이유로 비행기가 호수에 가라앉을 위험이 있으므로 착륙 마지막에 의도적으로 기수를 틀어 땅에 비행기를 올렸다. 착륙 경로가 잘 보이는 거의 유일한 사진. [* 출처: Корейский Боинг в Карелии (2018), Юрий Викторович Шлейкин ] || 헬리콥터에서 촬영한 모습 || 고정 표적이나 다름없는 대형 민항기에 발사된 두 발의 고기동 미사일이 아예 빗나가거나 날개 끝에만 맞아 계속 비행이 가능했던 점 등 운이 굉장히 좋았을 뿐더러, 소련 방공군 측에서 [[지대공 미사일]]을 발사하지 않아 대부분이 살아남을 수 있었다. 여기서 고기동 단거리 미사일인 [[R-60]]이 한발은 아예 빗나가고 한발은 열원인 엔진이 아니라 날개 끝에 맞았다는 점이 상당히 의아한데, 이는 자기가 요격하는 항공기의 정체가 민항기임을 확실히 확인하고 격추 지시를 한동안 거부했던 알렉산드르 보소프가 의도적으로 날개 끝에 맞췄을 가능성이 있다. R-60은 락온 없이 tactical drop으로 발사하면 근접신관이 작동하는 상태로 무유도 직선비행을 한다. 당시 인접 부대의 지휘관이었던 제5방공군 예브게니 그로보프스키 대령이나 제10방공군의 블라디미르 드미트리예프 장군 등의 증언에 따르면 대한항공 902편을 레이더로 발견한 순간부터 인접 부대 지휘관들 간에 지대공 미사일을 발사해 즉각 가루로 만들어버려야 한다는 격렬한 논쟁이 있었는데[* 당시 무르만스크에서 소련군의 군사 훈련이 진행 중이었다. 드미트리예프 대령은 지금도 고의적인 도발로 생각한다고 한다.] 결국 규정대로 요격기를 접근시켜 착륙을 유도하는 방향으로 진행했다고 한다. 그 결과 탄두가 작은 [[공대공 미사일]]이 발사되었고 대한항공 902편이 큰 피해를 보지 않고 살아남을 수 있었다.[* 대한항공 902편으로 정체가 확인된 후 소련군 지휘관들도 격추되지 않은 것에 안도했다.] [[말레이시아 항공 17편 격추 사건]]에서 알 수 있듯이 지대공 미사일은 무게 및 크기 제한이 있는 공대공 미사일보다 훨씬 큰 탄두를 탑재하기 때문에[* 예를 들면 이때 발사된 공대공 미사일인 R-60의 탄두 무게는 3kg이지만 당시 소련 [[방공군]]이 사용하던 SA-2 지대공 미사일의 탄두 무게는 200kg이다.] 피격되면 살아남는 것이 불가능하다. 또한 당시 Su-15는 탄두중량 40kg의 대형 중거리 미사일인 R-98도 장착하고 있었으나, 작약량이 적은 [[R-60]]을 사용한 점 역시 운이 따라주었다.[* 유명한 [[AIM-9]] 사이드와인더의 탄두가 9.4kg, [[AMRAAM]]의 탄두가 18kg이다. 그리고 R-60은 공대공 미사일 중에서도 가장 작은 편에 속하며, 탄두 중량이 3kg에 불과하다. ] ||[[파일:Kal902-sovietSoldiers.jpg|width=48%]] [[파일:KAL902_sovietsoldiers.jpg|width=48%]]|| || 비상착륙한 902편에 접근해 감시하는 소련 병사들의 모습. 비행기에 올라온 소련 병사들은 승객들의 카메라부터 압수했으나 오오타니 기시오(당시 50세, 사진가)는 필름을 빼서 숨겼고 미도 히데카즈(당시 26세, 사진과 대학생)는 카메라를 몰래 숨겨 가지고 있으면서 귀중한 사진들을 남겼다. || 비상착륙 후 승객들은 불빛 하나 없는 얼어붙은 호수 위에 착륙한 불 꺼진 비행기 안에서 2시간 동안 떨며 앉아 있었으며[* 주변 군부대 병력이 출동하여 일대를 수색해 비상착륙한 항공기를 찾는데 2시간이 걸렸다], 이후 군인들이 나타나자 [[미군]]인가 하다가 [[소련군]]인 것을 알고는 공포에 빠졌다고 한다. 다행히 소련군은 승객들을 최선을 다해 잘 대해주었는데, 하마터면 [[대한항공 007편 격추 사건|민항기를 격추시켜 민간인들을 대량으로 죽이는 대형사고]]를 낼 뻔했으니 일을 더 키우지 않으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우선 비행기에 올라 승객들의 [[여권]]을 걷은 뒤 3대의 대형 헬리콥터를 동원해 켐(Кемь / Kem)이라는 지역의 군사도시[* 호수 바로 앞의 Louhi는 이런 많은 인원을 수용할 시설이 없었다]로 부상자, 여자, 아이들부터 이동시켰고[* 4월이라 다들 복장이 가벼운 봄옷과 샌들, 슬리퍼 등이었다.] 따뜻한 장교 클럽에 남녀로 나누어 재우고 잘 먹였다.[* 앞서 말한 시오자키 세이코의 기록] ||[[파일:KAL902_kem_meal.jpg|width=100%]]|| [[파일:Гарнизонный дом офицеров, Кемь, 2018 год.jpg|width=100%]]|| || 식사를 제공받는 승객들의 모습. 카메라를 몰래 가지고 있던 미도 히데카즈의 목숨 건 사진 || 승객들이 머물렀던 장교클럽의 2018년 모습 || 한밤중에 군인들이 동원되어 장교 클럽의 내부 집기류가 치워지고 충분한 양의 침대와 담요가 설치됐으며 지역 주민들은 조리 도구와 관을 만들었다. 승객의 대부분인 한국인과 일본인들을 위해 [[쌀]]을 구해다 밥을 지어주었고 [[유럽]]인 승객들에겐 [[햄버거]] [[패티(고기)|패티]]와 곡물, 삶은 [[감자]]가 제공되었다. 이들의 통역과 인솔을 담당했던 스베틀라나 파시우코바에 따르면[* 해당 지역 공산당 선전부의 영어교사였고 한밤중에 갑자기 불려나와 뜬금없는 백명의 외국인들을 보고 황당했다고 한다.] 한 [[프랑스인]]이 [[오이]]와 [[바나나]]를 요구하자 얼어붙은 카렐리아의 산속 군사기지에서 한밤중에 어디선가 오이와 바나나가[* 오이는 러시아인들도 즐겨먹으니 쉽게 찾을 수 있었겠지만 당시 소련에서 바나나는 수입량이 적어 비싸고 귀한 과일인데다가 깡촌에서 찾기는 더더욱 힘들었을것이다.] 나타났고, 영유아를 동반한 가족 승객들(한국인 11명)은 근처의 그나마 시설이 좋은 군 병원[* October Railway Hospital, 1979년 해체됨]의 병실을 제공받았는데 당시 그들을 담당했던 의사 루드밀라 미니나에 따르면 그들은 쌀밥 외에는 주는 음식을 모두 거절하고 직접 요리를 하려 했으며 레닌그라드에서 온 당 간부들이 이들이 요구하는 것은 뭐든 구해주라고 하여 고생했다고 한다.[* 예를 들어 이들이 셀러리를 요구했는데 셀러리라는 말을 생전 처음 들었다고 한다.] ||[[파일:Гарнизон Подужемье (Garrison Poduzheme), Poduzheme airfield, Kem, 2021 satellite-label.jpg|width=100%]]|| || 당시 승객들이 머물렀던 포두제미예 기지 주변 지역의 2020년 모습(구글어스) || ||[[파일:Гарнизон Подужемье (Garrison Poduzheme), photo of the pilot of the 265th IAP Yu.V. Novozhilova, 1970s.jpg|width=100%]]|| || 당시 승객들이 머물렀던 포두제미예 기지의 1970년대 모습. 앞서 등장했던 제265방공군 소속 조종사 유리 노보질로프 촬영 || ||[[파일:Гарнизон Подужемье (Garrison Poduzheme) 2021 satellite2.jpg|width=100%]]|| || 포두제미예 기지의 현재 모습. 70년대 모습에서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 이렇게 첫날 밤이 지나고 둘째 날에는 승무원과 승객들이 [[국가보안위원회|KGB]]에게 조사를 받았다. 조종사를 제외한 탑승자들에 대한 조사는 통상적인 수준 이었다. 김창규 기장의 심문에 배석했던 제5방공군의 블라디미르 폴리오친 대령[* 김창규 기장이 심문 내내 굉장히 침착했고 말보로 담배를 피우면서 대답했다고 한다. 위의 제10방공군 지휘관과 마찬가지로 지금도 첩보 작전이었다고 생각하고 있다고 한다.]은 김창규 기장은 자신은 소련 국경을 넘는 줄 몰랐으며 전투기가 접근해 동체의 붉은 별을 보여줄 때 알았다고 대답했으나 KGB는 받아들이지 않고 심문과 진술서 작성을 5회 이상 반복했다고 증언했다. 최종적으로는 민항기에 첩보 설비를 설치해 승객의 목숨을 담보로 정보 공작을 벌이려 했으며 소련 방공군이 빠른 긴급 발진과 미사일 공격을 통해 정보 공작을 성공적으로 차단했다는 결론의 보고서가 작성되었다. 폴리오친 대령에 따르면 KGB의 항공기 수색에서 대한항공 902편 조종석 아래에 숨겨진 강력한 무전 설비가 발견됐고 권총이 포함된 파일럿 생존 키트가 발견됐다고 한다. 그는 착륙 후 소련군이 접근할 때까지의 빈 시간에 정찰 장비는 숲에 버리고 정찰한 정보를 모두 무선으로 송신했을 것으로 생각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당시 Su-15TM을 긴급 발진시켰던[* 아나톨리 케레포프와 세르게이 블로보드치코프] 265항공연대에서 참모장이었던 발레리 볼리닉은 자살 시도가 아닌 이상 그런 식의 정찰을 할 이유가 없고 민간인 승객까지 가득 태우고 그럴 이유는 더더욱 없다고 이를 부정하고 정찰 장비 같은 것은 발견된 적이 없다고 증언했다. 인근 57항공연대의 지휘관이었던 비탈리 다이모프도 "발견됐다는 무전 장비는 아마 백업용 통신 장비였을 것이다"고 말하고 승객을 태우고 그런 일을 한다는 건 말이 안 된다고 주장한다. 그는 자북극 근처에서 측정 장치가 오류를 일으켜 오토파일럿이 오작동했다 생각한다고 증언했다. 종합해 볼 때 KGB의 보고서는 민항기에 미사일을 발사한 일에 대한 명분을 만들고 체제 경쟁에서 이용하기 위해 적당히 만들어낸 주장으로 이해하는 것이 타당하다. [youtube(nkySvVWnIWI)] 그리고 그 다음 날 아침, 승객들은 스파이 혐의가 없다고 판단되어 모두 돌려보내진다. 당시 대한민국과 소련 사이에는 국교가 수립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에 미국이 중재했고, 승객들과 객실 승무원들은 [[팬 아메리칸 항공|팬암]]의 [[보잉 727]]에 타고 우선 중립국인 [[핀란드]]의 수도 [[헬싱키]]로 이동한 후, [[대한항공]]이 [[헬싱키 반타 국제공항|헬싱키]]로 보낸 또 다른 [[보잉 707|707]]에 타고 [[김포국제공항]]을 통해 귀국했다. 김창규 기장과 이근식 항법사는 추가 조사를 받은 후 역시 [[핀란드]]를 통해 귀국할 수 있었다. 참고로 이때 헬싱키로 투입된 비행기는 [[대한항공 858편 폭파 사건|9년 후, 폭파 사건의 희생양이 된다.]] 하지만 [[보잉 707|707]] 기체는 반환받지 못했으며, [[http://media.daum.net/foreign/others/newsview?newsid=20080606140016290|러시아 언론의 보도에 따르면 소련은 이 기체를 철저히 조사하여 자신들의 여객기를 개량하는 데 활용했다고 한다.]] 이 러시아 언론은 음모론을 제기하며 김창규 기장이 사실을 밝혀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 기사는 2008년 기사이고 김창규 기장은 2009년 3월 4일 미국에서 세상을 떠났다. ||[[파일:182EE01C4CA6788E32.jpg]]|| || 김창규 기장의 장례식 모습 ||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